이 포스팅의 목적은 <근대인의 탄생>, 김성은 지음, 아이세움을 읽고 막스베버의 생애와 그 시대 배경 속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과 어떻게 관계해 있는지에 대해 변혁의 역사의 큰 줄기의 흐름, 루터의 종교개혁과 칼뱅주의를 중점으로 금욕주의의 특징과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들의 흥미로운 사실들을 이해해 보는 것이다. 삶에서 소확행과 생존 문제에서 좀 더 자유롭고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나를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정신이 무엇인지 보자.
김성은 저 / 아이세움
1864~1920년, 베버는 학문과 문화 일반에 폭넓고 깊은 이해와 관찰을 통한 연구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1904-05년. 2회에 걸쳐 발표한다.
목차
막스베버의 생애와 시대 배경 그리고 글의 방향
1864년 에르푸르트에서 태어나 1894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취임한다. 1898년 질병으로 대학으로부터 휴가를 받음. 1903년 질병으로 교수직을 사퇴한다.
저자는 베버의 연구배경은 "4년의 공백을 거치면서 학계의 전통이나 분위기에 얽매이지 않고 훨씬 폭넓고 상상력을 발휘" 한 것에 있다고 말한다. 인생의 역작이 될만한 탁월함의 발휘는 아이러니하게도 감정과 질병, 정신과 몸의 쇠약과 크게 비례하기도 한다. 열매가 될 것인지 낙엽이 될 것인지. 나는 이 책에서 새롭게 접한 '선택적 친화력'의 의미에 집중하고자 한다.
베버가 활동한 시점은 18~19세기 서양의 굵직한 사건들, 미국 독립전쟁(1755-83), 프랑스혁명(1789), 독일의 통일(1871)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산업혁명의 물결과 함께 자본주의가 태동했던 때이다. 베버의 일생은 당시 자국 독일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시기와 함께 했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완성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 마리안네 베버와 함께한 1904년에 한 미국 여행이라고 한다.
그는 미국 뉴욕 항에 도착하여 "이 나라는 유럽과 너무나 다르구나"라고 하며 깜짝 놀란다. 그는 고즈넉한 유럽과는 달리 빠르게 첨단화된 미국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하면서도 강열한 개인주의를 보았다. 뉴욕의 전차 회사 사고에서 사람의 생명보다 이윤을 더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시스템의 부정적인 영향을 첨예하게 관찰한다. 이것은 서구 문명의 발전이라는 합리화의 결과로 오히려 사람들을 비합리적인 생활 태도를 가져온다고 한다. 자본주의는 세속적 속물주의에 빠진 니체의 '최후의 인간'처럼 자신들이 만든 행복,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만심에 빠질 수 있게 한다. 니체의 최후의 인간, 고유한 개인으로 자신의 생을 삶으로 창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다를게 없이 보편화되어 획일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군중들, 대중과 같이, 베버는 '최후의 인간'을 '정신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돈 버는 기계처럼 일하고 나의 삶을 대신하여 물질적 풍요로 대체받는 것으로 당연스레 인정한 것의 요인을 베버는 마르크스가 밝힌 바 물질적 경제적인 원인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던 측면으로 인간의 내부적인 요인에서 찾으려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발단이 준 의미
자본주의의 합리성을 베버는 당시보다 한 두 세기 이전의 시대의 사람들의 변화에 주목한다. 그는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발하여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의 결과 들불처럼 번진 프로테스탄티즘의 새로운 종교 단체에 주목한다. 서양의 정신문화를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는 종교적 교리인 금욕적 경건함에서 어떻게 물질적 풍요의 발단인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설명된다는 것인지 이견이 있지만, 베버는 경제적인 주요 원인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교리의 내부적인 원인, 각 개인 안에 침투되어 신념으로 의지화된 요인인 정신적인 태도는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첫 시발점은 사제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게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개방한 것에 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을 비판한 95개 조의 조항문을 교회 정문에 붙임으로써 큰 파장을 일으켰다. 루터는 죽음 이후의 구원을 목적으로 면벌부를 판매하며 농민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행태를 고발함으로써 교황청에 의해 파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루터의 행동으로 농민들의 평등의식을 고취시켜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키며 '농민 전쟁'으로 까지 규모가 커진다. 하지만 루터는 정치권력에 있어 종교의 권위가 결합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으로 제후들의 환심을 산다. (당시 시대배경에 따른 루터의 한계)
칼뱅주의의 특징적 차이
전통주의적인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직업을 '천직',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무'라는 의미를 둔다. 영어로 'calling'은 오로지 프로테스탄티즘이 받아들인 종교적 특징이다. -141p.
이 직업에 대한 개념은 종교적 가치에 노동에 대한 중요성을 현실적으로 더 부여함으로 자본주의의 특징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베버는 루터파 보다 종교와 세속적인 경제활동의 관계를 좀 더 적극적 요인은 칼뱅파에 있다고 본다. 17세기 칼뱅파는 현세 지향적인 성격이 훨씬 강하다.
. 칼뱅(1509-64)은 파리 대학에서 에라스뮈스와 루터의 글을 친구의 연설문에 인용하면서 이단으로 찍혀 도피하다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했다. 인간의 구원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했다. 칼뱅사상은 유럽 각지에 파급되어 프랑스의 위그노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영국의 청교도파(장로교, 독립교, 침례교 등) 등 여러 국가에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켰다. -83p.
"베버는 루터나 칼뱅 같은 종교개혁 선구자의 글에서 자본주의 정신의 단초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다만 루터주의, 칼뱅주의 같이 종교개혁 이후 발달된 사상과 각 종파의 종교적 실천에서 자본주의 정신의 토대가 되는 윤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146.
선택적 친화력이란
베버는 종교와 자본주의 간의 어떤 '선택적 친화력'이 작용하는지의 정도의 범위를 좁혀 탐구했음 밝힌다.
<선택적 친화력>은 괴테의 연애 소설로 독일어로 'Wahlverwandtschaft'; 화학용어로 두 원소의 친화력으로 인해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어 내는 현상이다. 원인과 결과의 선후를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둘 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일 수 있다는 개념을 베버가 사회과학 연구에 적용한 것이다. 단순한 인과관계에서 오는 오해를 막기 위해 괴테의 소설의 남녀의 애정관계를 '선택적 친화력'에 빗대어 종교적 신념의 현실적인 증명으로서 노동에 몰두하는 태도와 행위에 있어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과 관계하게 됨을 설명한다. -148p.
금욕주의의 특징
칼뱅을 추종하는 칼뱅주의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는 '예정설'이다. 이는 전통적 교리에서 주장하는 이웃사랑과 같은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내용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신앙이나 선행이 구원이 될 수 없다는 절대적 신의 선택이라는 주장이 칼뱅주의 신도들에게 내적인 고립감과 고독이라는 감정을 갖게 했다. 신도들은 사제의 주술적 마술에 의해 구원된다는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신앙을 추구했다. 스스로 선택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면서 먼저 구원받았다는 의심없는 믿음과 자기 직업에 충실함으로 일상에서도 수도사처럼 사는 엄격한 금욕적 생활을 영위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가치가 이처럼 일상생활의 윤리와 결합"되어 신앙과 윤리가 결합되었다. 속세를 거리를 두는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과 달리 비속세적인 금욕주의를 속세, 바깥의 세상으로 끌어 나와 더 사실은 치밀하게 일상 속에서 한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것인데, 이를 베버는 '세속적 금욕주의'라고 부른다. 오로지 내세의 구원을 위해 일상 속에서도 철저히 금욕적 생활에 몰두한 칼뱅주의는 다른 교리들과는 달리 더 엄격했다. "칼뱅주의는 예정설이라는 내세와 관련된 사상을 내세워 현세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 지침을 가장 체계적으로 만들었다." - 157p.
의도하지 않은 결과
칼뱅은 돈을 불릴 기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영국의 청교도주의는 칼뱅보다 이윤추구에 더 소극적인데 이유는 그들이 죄악시하는 부분은 부를 쾌락 추구에 이용하며 태만해지는 것에 있음을 베버는 주목한다. 프랭클린이 '시간은 돈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시간 낭비야말로 가장 큰 죄악인 것이다.
성경 마태복음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신이 부여한 재능을 늘리지 않고 나태하게 가만히 두는 것을 심하게 꾸짖고 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재물에 대한 교훈으로 받아들였다. 영국의 청교도주의는 나태와 쾌락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 합법적이라면 신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부를 축적하여 이후에 신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중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사치와 향락은 비합리적인 낭비요 재산을 증식하는 투자에 대해서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새로운 에토스가 형성과 발달에 기여한 것이다. 베버는 이를 프로테스탄티즘의 독특한 세속적 금욕주의라고 결론 내렸다. (향락을 금지하는데만 주력)
하지만 최초의 종교적 금욕주의 정신은 사라지고 금욕주의의 형식만 남아 금전욕으로 변질되었다.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소비활동은 필수적이다. 이제는 자본이라는 체제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일하게 만들면서 종교적인 초기 정신은 잃고 관성적인 물질욕만 남아 일해야 하는 현실만이 남아 있다. 자본주의 등장에 우연히 프로테스탄트적 윤리가 기여하였으나 튼튼한 자리를 잡은 자본주의에 어떤 정신 같은 것은 필요치 않게 되었다. 동기를 잃은 채 쉴 새 없이 일해야 하는 관습만이 남았다.
베버의 충고
그리고 나의 의견
"오늘날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라는 현실 역시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우연히 선택된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폭풍을 몰고 오듯이,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에 진정으로 몰두하여 스스로 선택한 중요한 가치를 위해 노력할 때 역사의 거대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203p.
저자는 거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것은 머리말에 쓰고 있다. 고전이 오늘날에도 의미를 갖고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를 직접 탐색하며 사유할 기회를 하나의 선택으로 여긴다면 이 책은 그 여정에 하나의 길잡이가 될 뿐 어려움이 있더라도 배워가며 읽어내는 노고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저자의 조언처럼 책을 처음 접할 때는 매우 잘 이해된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정리해 나가면서 베버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어떻게 설명했는지가 더욱 궁금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자본주의의 속에 사는 시간들이 비인간적이고 때론 너무도 잔인하게 다가온다. 그럴수록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순간 베버의 모순적인 듯한 논지는 매우 흥미롭다. 최초의 자본주의의 정신은 종교적 금욕주의에서 추구한 하늘이 부여한 재능, 그것에 충실한 삶으로 이루어진 노동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한다. 끝없이 부를 축적하며 재능을 활용하고 이후에 신앞에서 스스로 당당함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믿으며 성실하고 근면하게 그리고 투절하게 살아낸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였다니, 자본주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 나는 한없이 무력해지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베버의 논지가 내 안에 울려 퍼지는 커다란 종소리가 되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오리혀 잠자고 있던 내 의지의 불씨를 깨워 초를 킨다.
※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