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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공포
불안은 삶의 정상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항상 뭔가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초조해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시냅스와 자아>에서 뇌는 전반적인 구조와 기능에 있어 모두 비슷하지만, 미시적으로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배선되어 인간을 각자 다르게 만든다. 그 차이는 각자의 유전자와 다른 경험의 유일무이한 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 본성과 양육의 결과가 우리의 뇌이다. 불안을 뜻하는 “anxiety”와 그에 해당하는 유럽어 모두 라틴어 “anxietas”에서 왔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angh”에 뿌리를 두고 이는 “짐을 짊어진,” “고통을 겪는”이라는 의미와 “anguished”와 같이 일차적으로는 갑갑하거나 죄어들거나 불편한 신체 감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_19p. 정서에 대한 저자와 전통적 입장의 차이를 보자. 공포와 불안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정서를 이해하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미국 심리학자의 아버지인 윌리엄 제임스는 공포란 우리가 위협에 반응할 때 일어나는 의식적 느낌이라고 주장했다. 즉, 고유의 신체 신호에 대한 지각이라 보았다. 느낌이 바로 정서라는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불안이 “느껴지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분명 정서의 본질이다”라고 말했다. 그 밖에 많은 전문가들이 정서가 심리적으로 구성된 의식적 경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행동주의자들은 다르게 주장한다. 오직 행동만이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이후 공포는 특정 느낌이 아니라 자극과 반응의 관계일 뿐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자극과 반응이 뇌와의 어떤 연결과 관련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생리학 이론가들도 행동주의자들과 같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의식적 경험을 배제했다. 스위스 심리학자 셰러도 정서를 인지적 평가, 반응의 표출, 생리적 변화, 의식적 느낌으로 구성된 처리 과정으로 보았다. (이 견해는 공포란 위험하다는 인지적 평가 이에 반응으로 특정 행동을 표출, 생리적 각성하여 공포를 느끼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에는 허점을 갖는다. 공포를 전체 처리 과정이면서 두려움이라는 특정 느낌으로 보았다. 또 다른 이론은 정서가 뇌에 고정 배선되어 그 회로를 촉발하는 자극이 있으면 활성화된다고 설명한다. 이 견해는 기본 정서 이론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옹호하는 견해로 선천적인 행동반응, 생리반응, 의식적 느낌은 모두 뇌의 공포 중추 내지는 공포 회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르두는 공포의 느낌 그 자체는 선천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의 뇌가 비의식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자각할 때 공포의 느낌이 발생한다. 만일 기억을 통해, “알고 있는” 위협이 현존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주의가 이 자극에 집중되고, 그 자극은 각성 상태의 원인으로 의식적으로 지목된다. 정서를 인지적으로 조합된 의식적 느낌으로 보는 것은 정서가 “심리적 구성물”이라는 최근 개념이 가장 가까운 인지 기반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문학, 종교, 예술 작품 등에서 다루어왔던 우리가 불안이라고 부르는 정서를 이제는 과학이 다룰 수 있을 정도의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졌다. 뇌가 위협을 감지, 반응하는 비의식적 과정과 의식적 공포와 불안을 분리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의식이 요구되고 요구되지 않는지 판단하는데 신중해야 한다. 르두는 뇌의 위협처리 과정에 중점을 두어 연구했다. 동물 세계에서 방어 행동과 뇌 메커니즘을 다룬다. 저자의 다른 점은 우리가 공포나 불안 같은 정서를 동물에게서 물려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위협 처리 메커니즘에 의해 촉발된 행동에 반드시 느낌(공포와 불안)이 동반되는 것은 아니다. 그 느낌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의식을 이해해야 한다: 의식의 물리적 기반, 의식에서 기억의 역할, 비의식적 위협 처리 과정의 결과를 경험할 때 어떻게 의식적인 공포의 느낌이 발생하는지를 살핀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뇌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가 사람들이 괴로운 감정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법을 어떻게 제공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정서의 뇌를 다시 생각하기
프랜시스 베이컨은 수백 년 전에 과학자들은 일상 언어를 용어로 사용하는 데 주의해야 하며, 단순히 해당되는 단어가 있다고 해서 은연중에 그 사물에 실재성을 부여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저자는 과거 자신이 잘못 정의한 연구개념에 대해 반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우리는 공포라는 원초적 정서를 동물에게서 물려받았으며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위험에 처하면 같거나 유사한 기본적(원시적)경험을 하고 동일한 방식의 공포 반응을 표출한다고 들었다.
과학적으로 공포나 불안을 논의할 때 우리는 “공포”, “불안”이 일상적 의미를 갖도록 현존하거나 예상되는 위협에 대해 사람들이 겪는 의식적 경험의 서술이 되어야한다. 즉, 공포 자극이 공포 시스템을 활성화해 공포 반응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대신, 위협 자극이 방어 시스템을 활성화해 방어 반응을 일으켰다고 말해야 한다. (이이유에 대해서는 53-66pp.) 공포나 불안의 느낌과 위협을 감지, 반응하는 메커니즘을 분리하면 불안의 느낌이 불안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행동 및 생리 증상을 제어하는 것 이상의 메커니즘을 비롯해 더 효과적인 치료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우 인간중심적인 관점으로 뇌를 바라봄으로 비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과거의 생존 메커니즘이 뇌에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의식적 내적 성찰로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 뇌에서 공포의 위치를 찾기보다, 동물과 인간의 유사한 과정-위협을 감지, 반응하는 비의식적 과정-이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의 느낌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알아내려 노력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은 편의상 자신의 반려동물 역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심지어 생명이 없는 대상을 보고도 의인화하려든다. 2013년 구달은 동물에게서 연민, 이타주의, 계산, 의사소통, 심지어 일조으이 의식적 사고의 사례를 여러 차례보았다고 말했다. 구달은 동물이 “우리가 인간의 정서라고 설명하는 것과 비슷한 정서를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르두가 보이에 과학적 관행에서는 엄격하고 확실한 증거 없이, 동물이 그런 느낌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직관을 기반으로 동물이 의식적 느낌을 가진다고 결론 내리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영장류 동물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동물이 무엇을 느끼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업다”고 시인하며 그의 전문 분야인 “공감empathy”에 있어 동물 의식의 역할이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인간의 경우에도 그가 공감이라 부르는 것이 자동적으로, 즉 비의식적으로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인간이 느낌을 확실히 아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면서, 동물이 느낌을 가진다는 주장을 강호했다. (인간의 느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언어 자기 보고이다) 그는 동물이 느낌을 갖는다고 나아갔는데,인간의 뇌는 세포 구성, 연결성 패턴도 다르며 뇌에서 복잡한 인지 기능을 수행하는 전전두 피질은 다른 포유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타고난 언어능력이다. 르두의 관심은 우리가 동물의 행동을 의식에 기대하지 않고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지는 정서를 유기체가 그 결과를 의식적으로 경험할 때 느끼는 것은 감지, 반응의 과정과 느낌이 발생하는 과정을 분리하는 것에서 부터 정서가 실제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적 느낌에 너무 큰 비중을 두는 것이 아닌 공포와 불안의 과학에서 느낌에 중점적 역할을 부여하되 그에 합당한 비중을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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